전주를 대표하는 술을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막걸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주에는 조선시대부터 이름을 알렸던 또 하나의 술이 있습니다.
바로 ‘이강주(梨薑酒)’입니다.
배와 생강을 비롯해 울금과 계피, 꿀 등을 사용해 만드는 이강주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전주의 전통주입니다. 옛 문헌에 제조법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으며, 평양의 감홍로와 전라도의 죽력고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명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한때 명맥이 끊길 위기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식품명인 조정형 명인이 제조법을 계승하면서 오늘날까지 전주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름만 봐도 어떤 술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강주’라는 이름에는 술의 특징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한자로는 梨薑酒.
‘이(梨)’는 배, ‘강(薑)’은 생강, ‘주(酒)’는 술을 의미합니다. 말 그대로 배와 생강을 넣어 만든 술이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인 증류주와 달리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쌀과 보리, 누룩 등을 이용해 술을 빚고 증류한 뒤 배와 생강을 비롯해 울금, 계피, 꿀 등을 더합니다.
때문에 술에서는 배와 꿀에서 오는 은은한 단맛과 함께 생강과 계피 등에서 나오는 향긋한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수가 높은 전통 소주와는 다른 독특한 풍미가 이강주의 특징입니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등장하는 이강주

이강주는 최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진 지역 특산주가 아닙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작성한 생활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에는 ‘이강고(梨薑膏)’를 만드는 방법이 기록돼 있습니다.
1924년 발간된 조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이강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강주’보다 ‘이강고’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졌던 술인 셈입니다.
과거에는 술을 증류한 뒤 배와 생강 등의 재료를 더해 특유의 향과 맛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러 문헌에 제조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강주가 특정 집안에서만 마시던 가양주를 넘어 널리 알려진 술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평양 감홍로·전라도 죽력고와 함께 이름난 술

이강주를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조선 3대 명주’입니다.
최남선이 1946년 펴낸 『조선상식문답』에는 당시 이름난 술로 평양의 감홍로, 전라도의 죽력고와 이강고 등이 언급됩니다.
감홍로는 평양을 대표했던 향기로운 증류주입니다.
죽력고는 대나무를 가열해 얻은 죽력을 이용하는 전라도의 전통 증류주이며, 이강주는 배와 생강 등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술을 빚는 재료와 방식이 달랐던 시대, 전주에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술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사라질 뻔했던 전주의 술

오랜 역사를 가진 이강주도 현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와 근현대를 지나면서 전통적인 가양주 문화가 크게 위축됐고, 많은 지역 전통주가 사라지거나 명맥이 끊겼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강주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데에는 조정형 명인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정형 명인은 집안에서 전해오던 이강주의 제조법을 계승하고 전통적인 제조방식을 연구해 술의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발효학을 공부하고 주류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의 전통주를 연구하면서 이강주의 제조법을 체계화했습니다.
1987년에는 ‘향토술담그기’가 전북 무형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조정형 명인은 이후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9호로 지정됐습니다.
1990년 제조면허를 취득하고 1991년부터 이강주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하면서 집안에서 이어지던 술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배·생강·울금·계피·꿀이 한 병에

이강주의 재미있는 점은 들어가는 재료입니다.
배와 생강이라는 이름에 등장하는 두 재료 외에도 울금과 계피, 꿀 등이 사용됩니다.
전통적으로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농산물 역시 술의 중요한 재료였습니다.
조정형 명인은 과거 인터뷰에서 완주 이서 지역의 배와 봉동 지역의 생강 등을 사용한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전주와 완주를 둘러싼 지역의 농산물이 한 병의 술에 담기는 셈입니다.
여러 재료가 들어간다고 해서 단순히 단맛이 강한 술은 아닙니다.
증류주의 깔끔함에 배와 꿀의 부드러운 맛, 생강과 계피의 향이 더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강주는 일반적인 희석식 소주나 막걸리와는 상당히 다른 전통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주에서 이어지는 대한민국 식품명인의 술

이강주는 지금도 전주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전주시 덕진구에 이강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문헌에 등장했던 술을 현대적인 제조환경에서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만을 강조하는 술도 아닙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국내외 주류 품평회에도 출품되며 전통주의 경쟁력을 평가받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이강주25’가 국제 주류 품평회 International Spirits Challenge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수백 년 전 조선 사람들이 즐겼던 술의 제조법과 이야기가 현재까지 이어져 세계 주류 시장에서도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전주에는 막걸리 말고도 기억해야 할 술이 있습니다

전주는 오랫동안 음식의 도시로 알려져 왔습니다.
비빔밥과 한정식, 콩나물국밥이 대표적이고 술 문화에서는 막걸리 골목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주의 술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하나 더 등장합니다.
이강주입니다.
배와 생강에서 이름을 따고, 조선시대 문헌에 제조법이 기록됐으며, 한때 사라질 위기를 넘어 오늘날까지 전주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옛 기록 속에서 이름난 술이었던 이강주는 이제 전주의 술 문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역 문화유산이 됐습니다.
전주를 여행하며 지역의 오래된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면 막걸리와 모주뿐 아니라 이강주라는 이름도 기억해둘 만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마셨던 전주의 명주를 지금도 같은 도시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