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발전량은 빠르게 증가했지만 생산한 전기를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송전망이 부족해 신규 발전설비까지 제한해야 했던 상황에서, 정부가 기존 전력망을 보다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이번 조치는 침체됐던 호남 재생에너지 산업뿐만 아니라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도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입니다.

전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보낼 길’이 부족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2024년 9월 호남권의 주요 변전소를 ‘계통관리 변전소’로 지정했습니다.
당시 광주·전남을 비롯한 호남에서는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발전설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발전량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지역에서 생산한 전력을 모두 소비하지 못하면 다른 지역으로 보내야 하는데, 이를 담당할 송전망의 수용능력 역시 포화 상태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발전설비가 계속 늘어날 경우 전력계통의 안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신규 재생에너지 발전 허가가 사실상 막히게 됐습니다.
호남은 태양광 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도 정작 새로운 발전설비를 연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셈입니다.
일부 사업자는 전력망 접속을 위해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지역 태양광 시공업체와 재생에너지 사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새 송전망만 기다리지 않는다
이 같은 규제가 시행된 지 약 2년 만에 정부가 새로운 대책을 내놨습니다.핵심은 막대한 비용과 긴 시간이 필요한 신규 송전망 건설만 기다리지 않고 현재 갖춰진 전력망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유연한 계통접속 제도’를 도입하고 에너지저장장치인 ESS 등을 적극 활용할 계획입니다.
전력망이 혼잡하지 않은 시간에는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최대한 수용하고, 전력이 몰리는 시간에는 발전량이나 전력 흐름을 조정하는 방식 등을 통해 기존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정부는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전국적으로 재생에너지 수용능력을 현재보다 52GW 추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호남지역의 송전역량은 이번 대책을 통해 27GW가량 확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일부 지역의 신규 재생에너지 계통 접속이 2034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기존 전력망 활용방식이 바뀌면서 시기를 크게 앞당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도 중요한 이유
이번 대책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정부가 추진하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반도체 공장은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입니다.
정부가 구상하는 호남 반도체 팹에는 약 6.3GW 규모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더라도 실제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고 가동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정부가 광주 군공항 이전을 앞당기면서 기존 군공항 부지에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빠르게 조성하려는 것도 결국 전력·용수·부지 확보가 동시에 이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호남의 풍부한 재생에너지가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호남에서 만든 전기를 호남에서 쓴다’
그동안 호남의 재생에너지 문제는 역설적이었습니다.태양광 등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은 좋은데 지역 내 대규모 전력 수요처가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남는 전기를 수도권 등 다른 지역으로 보내려 해도 송전망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전기를 생산할 능력이 있음에도 새로운 발전설비를 제한하는 상황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 문제를 언급하며 호남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까지 장거리 송전하기보다는 생산지역에서 직접 소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주문했습니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처럼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첨단산업이 호남에 들어온다면 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역에서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생산하고, 지역에 들어선 첨단산업이 그 전력을 소비하는 ‘에너지 지산지소’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남은 그동안 송전망 부족 때문에 재생에너지가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는 역설을 겪었습니다.
2년 만에 규제가 풀리는 이번 조치가 지역 태양광 산업의 재가동을 넘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산업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전력 기반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